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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모두를 위한 미술: 잃어버린 꼴을 찾아서의 마지 막 장인 5장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미술과 미적 체험 사이에서 일상으로 연결하기로 들어서는 풍경이다.
사진5-1. 우리 가까이 전 중 일상이라는 표상 그리고 그림
살아 있는 그림: 누구나 잘 그릴 수 있다
시각은 자기중심에서 볼 수밖에 없는 한계로 인하여 대상을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그러나 데카르트 관점은 이러한 시각에좌뇌 편측화를 초래하였다. 대상뿐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도분리하여 현대의 자기소외에 이르렀다.이러한 시각을 치유하고, 잘 보기 위한 우뇌로 보고 그리기는그리는 과정에 우뇌 시각을 활용하여 모든 것이 합일될 때 그림이 살아난다. 결국 그림도 잘 그리게 되고, 몸과 마음의 합일을체화한다.다섯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마지막 장에 들어서며, ‘살아 있는 그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 우선 살아 있는 그림을 ‘누구나 잘 그릴 수 있다’는 구체적인 방법을 확인할수 있는 사례 한 조각을 소개한다.‘우리 가까이’는 대학 동기들과 함께 만든 그룹이다. 첫 전시를함께 기획하며 내 작품을 준비할 때였다. 그 무렵 나는 강의 일정이 바빠 작업을 거의 하지 못했다. 주중에는 부산에서 수업하고, 주말에 서울에 올라와 아이들을 챙겨야 하는 나날이었다. 특히 그 주에는 다음 날 아침에 서울에서 대학 업무 미팅이 있었다. 오후에 동기 모임에 가서야 시간을 낼 수 있었다.작업 아이디어는 우뇌 시각을 활용하여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면 ‘누구나 잘 그릴 수 있다’는 교육적 의도를 나의 그림에 적용해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네 가지 마음으로 시작하였다. 하나는 일상적 소재와 주제를 선택했다. 무엇이든 눈에 띄는 걸 보고 그릴 작정이었다. 이러한 태도를 바탕으로 그날 아침회의 입장 시 받은 장미를 그려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적 소재를 그린 그림과 병치해서 일상의 한 부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다. 둘은 그림이 쉽고 재미있다는 것을 나누고 싶었다. 셋은 그림을 일상으로 연결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의도가 없었다면,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틈새에 작업하는 일은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은 일상적 재료를, 그것도 될 수있으면 재활용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다.이러한 생각은 자기 치유적 과정으로서의 미술을 교육자로서,작가로서 내내 유지하며, 일상과 연결하고자 해 온 일관된 입장이었다. 특히 2025년부터 우리 집 차고를 고친 ‘눈메 그리는 차고’에서 그림을 나의 일상과 공간으로 연결하고자 하였다.아침에 나가면서 바탕 재료로 몇 년 전 전시 도록을 챙기고, 그림 도구로 크레파스와 연필을 준비했다. 아침 회의에서 받은 장미 한 송이를 모임에 가져가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져간도록 위를 흰색 크레파스로 덮어 바탕을 만들고, 장미를 보며 아무 생각 없이 연필로 그려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어느새 말라버린 장미 한 송이와 그것을 그린 그림을 옆에 나란히 놓고〈 일상그리고 그림〉이라고 화제와 사인을 하여 액자를 맡겼다.(사진5-1)전시가 시작되자 큐레이터 선배에게 그 그림을 다섯 장까지그려올 수 있다고 하였다. 며칠 후 그녀는 미술협회 회장이 내그림을 보고는 “드로잉이 좋다”며 사 가셨다면서, 그림을 다시그려오라고 했다. 의외였다. 처음으로 그림이 팔리기도 했지만,누구나 그릴 수 있는 정도로 그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두 번째 장미 그림을 다시 그리려니, 똑같이 그리기는하였는데 첫 번째 그림처럼 살아 있어 보이지 않았다. 다시 그릴 시간이 없어 그냥 액자를 해서 화랑에 가져다 놓으니 선배도“얘, 지난번 그림과 같지 않다.”라고 한다.‘누구나 잘 그릴 수 있으며 미술가가 될 수 있다’는 믿음과 더불어, 우뇌로 그리는 방법을 안다고 생각하였는데, 잘 안 된 것이다. 이유가 있었다.
이 경험을 통하여 누구나 잘 그릴 수 있지만, ‘우뇌로 보고 그리기’에서 ‘그림의 생명성’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재인식하였다. 처음에 그렸던 ‘살아있는 그림은’ 환경이 어떻든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그리며 그만하면 되었다’는 느낌이 있었다. 잘 하려고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그러한 생각이 없이 그리기에 몰두하며, 시간이나 공간에 대한의식마저 잊은 채 몰입한 순간에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바로 그러한 순간에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이 연결되며 그림에 생명성이 발현된다. 우뇌로 보고 그리는 과정에서 합일되는지점에서 무관심한 의도, 즉 칸트가 말하는 ‘무목적적 합목적성’에 부합하는 미학적 상태이다. 이 순간들의 집적에서 생명성이드러난다.두 번째 그린 그림은 똑같이 그리려는 의도가 강해져서 전과같이 살아 있는 그림이 될 수 없었다. 잘 그리려는 의도, 생각을빼야 우뇌 시각이 활성화되고 살아 있는 그림이 그려진다. 손으로 하는 명상이다. 동양화를 붓으로 그릴 때도 그런 경지에 들 수있어야 기운이 생동하여 최고의 그림이 된다.이 그림의 생명성이 비주얼 리터러시의 최고 단계이다. 베티의 워크숍에서도 닷새 만에 자화상을 살아 있게 그릴 수 있도록하였다. 구석기 후기 동굴벽화의 동물 그림이 살아 있어 보이는 이유는 샤먼이 이러한 태도로, 우뇌로 보고 그리는 순간에 모든것을 합일, 연결하는 순간의 집적에 기인한다.이때 모든 것을 연결하며 살아 있는 그림은 당시의 정령신앙을 바탕으로 자연과 함께 생태적으로 살아가는 시각적 인식과시각적으로 사고하는 태도에서 나온다. 작가가 이러한 인식을기반으로 우뇌 시각으로 보고 그리는 순간에 모든 것이 합일되며 생명이 그림에 투사되는 것이다. 즉, 살아 있는 그림은 잘 그리려는 좌뇌적 의도가 아니라, 그리면서 우뇌 시각을 깨워 내면과 외면, 나와 우주가 물아일체의 순간을 통과하며 관객까지도연결한다.이는 작가들만의 고유한 능력이 아니다. 천재로서의 미술가는르네상스 시대 미술가들에 대한 신화이다. 이는 장인에 불과했던 화가들의 지위를 일정 부분 높인 것에 가치가 있다. 하지만,우리 시대에는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아트는대가들만의 능력일 수도 있지만, 교육제도 안에서 짓밟혀 아직발현되지 못한 우리의 잠재력,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시각적 능력이기 때문이다.우뇌로 보고 그리기는 잘 보기 위한 방법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누구나 우뇌로 이행해서 보는 방법을 배우면 잘 그릴수 있다. 단,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고 과정을 즐겨야 한다.자연스럽게 스미는, ‘그러한 그림놀이’이다.그래서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 미술259V.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계의 미술만이 미술이 아니다. 내게 진정한 미술은 모두를 위한과정 중심의 미술, 아트잉이다.이 진정한 미술은 시각훈련으로서, 교육에서 기초교육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누구나 글을 배우면 읽고 쓸 줄 알듯이, 그림을 그리며 보고 느끼는 비주얼 리터러시를 배양하는 훈련이다.이러한 미술의 기능이 일반인을 위한 기초 교과로 확대되어야한다.이제 이미지를 다루는 비주얼 리터러시로서의 미술, ‘그러한그림놀이’도 우리의 일상으로 연결한다. 어느덧 마지막 역이다.아니, ‘중간 역’이라 해야 할까,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서막이라 해야 할까?